禪 林 院 址

江原紀念物 第53號
江原道 襄陽郡 西面 黃耳里

2008年 4月 29日     土地博物館大學


선림원지는 남설악 미천골*에 자리한 신라시대의 절터로서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않아 원시의 자연이 아주 잘 보존된 미천골 자연휴양림안에 있다.

*미천골 유래 : 이 사찰이 번성할 당시 한끼 쌀 씻은 물이 계곡을 따라 하류까지 이르러 米川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이 1985년 7월부터 1년 이상에 걸쳐 조사한 결과 順應法師 등이 창건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복 직후 출토된 신라 범종의 梵鐘銘文에 따르면 이 종이 만들어진 무렵인 804년경에 해인사 등 화엄종 계통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 당시 출토된 초창기 때의 기와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이후 대량출토된 기와나 삼층석탑, 석등, 비석귀부 등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물들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이 무렵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절의 가람배치는 삼층석탑 뒤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금당건물로 되어 있다. 주춧돌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편 언덕의 석등 북쪽에서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禪林院址三層石塔, 보물 제444호

이 三層石塔은 법당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는데 2층의 基壇 위에 3층의 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이다.

1966.9.21에 보물로 지정된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탑으로 여러 장의 돌로 탑의 토대를 만들고,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윗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둘로 나눈 뒤 8부중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체감되고 각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널찍하고 밑면의 받침은 5단이며 추녀 밑은 수평이다.

지붕의 경사는 급하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들리고 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 : 머리장식받침)이 있고, 쇠꼬챙이장식을 꽂았던 구멍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보주(寶柱 :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모양의 돌이 있으나 원형이 아닌 듯하다.

외형상 정제된 비례를 보여주지만 8부중상의 조각은 섬약하고 석재의 구성도 규율성을 잃고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나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복원공사가 진행되기 전 기단부에서 小塔 60여 기와 銅鐸 1개가 발견된 일이 있다. 탑 앞에는 眼象을 새긴 拜禮石이 남아 있다.

禪林院址 石燈, 보물 제445호

1966.9.21 보물로 지정된 이 石燈은 선림원터 안의 서쪽 언덕 위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석등이다.

선림원은 신라의 옛 절로, 이 곳에서 출토된 신라범종을 통해, 당시 해인사를 창건했던 順應法師에 의해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지금은 이 터가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여러 유물들이 남아있고 각종 기와와 토기조각들이 아직까지도 발견되고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지붕돌은 8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경사진 면은 가파르지 않고 부드러운데, 귀꽃조각과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다.

지붕돌이 일부 탈락되긴 하였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과 장식적으로 흐른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개선사지석등(보물 제111호)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弘覺禪師 塔碑 龜趺(귀부) 및 螭首(이수), 보물 제446호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이 塔碑는 1966.9.21에 지정되어 있으며,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은 파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고 현장에는 귀부와 이수 부분만 남아 있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받침인 거북머리의 龜趺와 비몸, 비머리돌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바로 비머리가 올려져 있다.

비받침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비몸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비머리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비의 파편과 '大東金石書'에 의하면, 경서에 해박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인데 신라 후기에 王羲之(왕희지)의 글씨가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禪林院址 浮屠, 보물 제447호

이 浮屠는 일제시대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基壇部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부도임을 알 수 있는데, 신라 때에 돌로 만든 부도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기단의 아래받침돌ㆍ중간받침돌ㆍ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기단의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부도로,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적인 부도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확한 부도의 건립시기는 절터에 남아있는 홍각선사비와 이 부도가 홍각선사의 부도인 점으로 미루어 신라 정강왕 1년(886)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부도는 선림원지 3층석탑, 석등,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절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1965년 8월에 각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는데 원래의 위치는 뒷산 중턱으로 약50m 쯤 올라가야 한다. 건립연대는 886년으로 추정된다.

禪林院址出土新羅梵鐘, 804년(신라 애장왕 5)

1948년에 출토되어 1949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이관, 보존되어 오던 중 6.25전란으로 월정사가 소실될 때 함께 파손되어 현재 그 일부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종은 總高 122㎝, 鐘身高 96㎝, 口經 68㎝ 크기의 中鐘으로 출토 당시 철제현색(鐵製懸索)이 그대로 붙어 있었으며, 종신의 내부에 吏讀로 된 銘文이 있어서 주종(鑄鐘) 연대는 물론 승려ㆍ시주자 등 주성(鑄成) 관계 인물들을 알려 주고 있는 매우 귀중한 종이다.

또한 이 종은 국내에 남아 있는 범종 중 上院寺鐘(725)ㆍ聖德大王神鐘(771)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종으로, 이들 2구의 종처럼 웅장한 편은 아니나, 종의 형식은 전형적인 신라종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세부의 표현 수법은 실상사파종(實相寺破鐘)과 매우 비슷하다.

종신의 구조는 윗부분에 이중원권문(二重圓圈文)의 상대에 반원권문 연화보상화(蓮花寶相花)의 4유곽(乳廓)이 붙어 있으며, 그 아래 종복 부분에는 2체의 쌍주악 비천상(飛天像)과 2개의 이중원권연화문(二重圓圈蓮花文) 장식의 당좌(撞座)가 교대로 배치되었고, 아랫부분에는 19구의 불좌상(佛坐像)이 조각된 하대가 있는 구조이다.

비천상은 구름 위에서 天衣자락을 흩날리며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횡적(橫笛)과 요고(腰鼓 : 장구)를 연주하는 모습인데, 구름과 천의자락ㆍ자세 등에서 아직은 생동감이 엿보이며, 특히 피리를 부는 비천상은 실상사종의 비천상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대체로 이 종은 안정감과 균형감이 있으며, 세부 문양도 고부조(高浮彫)의 돋을새김으로 섬세함과 장식성이 농후한 편이다. 이 종은 현재 비록 부분만 남아 있지만, 음통과 종신형ㆍ상하대ㆍ4유곽 및 비천상을 갖추고 있어서 상원사종ㆍ성덕대왕신종과 함께 그 뒤의 韓國鐘의 규범을 이룬다는 점에서 공예사상 의의가 있으며, 주악비천상과 하대의 불좌상은 9세기 초의 불교조각양식을 살펴보는 데에 기준이 될 수 있다. 특히 이두명문은 인명ㆍ관직ㆍ지명 등을 알려 주고 있으므로 신라금석문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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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 200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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